1. 임오군의 반란
1882년 구식 군인들이 차별에 항의하기 위해 침입한 것입니다.
강화도조약 체결 후 정찰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은 기존의 5개 주둔지를 폐지하고 새로운 부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별기군은 일본 교관에게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고 구식 군대보다 훨씬 좋은 대우를 받았다. 이 차별로
구식 군대는 매우 불만족 스러웠습니다. 또 1년 넘게 밀린 임금으로 쌀을 받았는데, 그 쌀에도 모래와 쭉정이가 섞여 있었다. 이에 분노한 구식 군인들은 민씨의 외가 친척들을 죽이기 위해 달려가 일본 공사관으로 달려가 불을 질렀는데 이것이 임오군란이다.
흥선대원군이 개입하여 이 사건을 처리하였지만 청군이 쳐들어오면서 명성황후의 외가들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다. 청나라 군대가 도착하자 일본도 군대를 보냈고, 이후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으로 더욱 약해졌다.
2. 갑신 쿠데타
1884년 갑신년에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개화당이 일으킨 대정치적 변화를 가리킨다.
계몽당은 조선후기 계몽정치를 주창한 정치단체를 말한다.
1870년경 박수수, 오경석, 유홍기는 개항을 통해 선진 서구문명을 수용하고 근대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계몽사상의 틀을 만들고 젊은이들에게 계몽사상을 공부하게 하여 계몽파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임오군의 봉기 이후 정찰파는 급진정화파와 온건파 개헌파로 갈라진다.
급진계몽파는 서구의 앞선 과학기술과 이데올로기, 제도를 적극 수용해 하루빨리 조선을 개화시키려는 사람들로 구성됐다.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등 청나라의 간섭에 반대하고 뿌리부터 개혁을 시도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급진적인 계몽주의 단체인 “계몽주의 정당”이라고 불렸습니다.
개화중도파는 개혁을 원하지만 주변을 살피고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소극적인 집단이다. 김홍집·김윤식·박정양·어윤정 등 급진계몽파보다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다.
서구의 첨단기술을 받아들이는 것도 좋지만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제도와 이념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급진 계몽파는 갑신 폭동을 일으켰고, 온건파 계몽파는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당시 조선은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개화정책을 펴야 했다. 그러나 권력을 쥐고 있던 민씨는 개화정책을 계속 미루고 청나라를 지지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였다.
특히 신식군인 별기군과 구식군이 차별을 받자 구식군은 임오군의 반란을 일으켰다.
조선이 근대적 개혁을 단독으로 추진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에 항거한 정찰파는 일본군의 힘을 빌려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려 했다.
정보정치에서 활약했던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은 우정국 설립을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개화파는 민정권과 청나라를 몰아내고 복지제도를 정비하기 위한 대대적인 대책을 발표하는 등 개혁에 돌입했다. 등 많은 개혁이 있었다. B. 청나라에 조공을 보내지 않고, 카스트 제도를 폐지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하고, 잘못된 관리를 처벌합니다. 그러나 청군이 다시 공격하자 일본은 철수했고 쿠데타는 3일 만에 실패했다. 이후 개혁파의 중심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청나라의 간섭이 거세지자 민의 세력은 다시 커졌다.
갑신 쿠데타는 한국 최초의 자발적 근대화 운동이었다.
그러나 개화사상은 서민들 사이에 널리 퍼지지 못하여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일본의 힘에 의지하여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3. 갑오개혁
이 개혁은 1894년에서 1896년 사이에 세 번 시행되었다.
이때 조선도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부가 중심이 되어 낡은 제도를 없애고 근대국가가 되려고 했다.
문제는 일본이 개혁을 강요받은 이후에 조치가 취해졌다는 점이다. 김홍집을 중심으로 김윤식 유길준 등 친일 정찰병들이 앞장서서 병무서라는 조직을 만들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개편했다.
갑오개혁을 통해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독립을 도모하고 구제도를 청산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였다. 양반과 상민의 신분을 폐지하고 세금을 화폐로 냈다. 또한 학교 설립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갑오개혁은 조선을 근대화하려는 시도였으며 이후 많은 개혁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개혁은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이 조선을 점령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일본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